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러시아워로 혼잡한 도로를 건너 피어26을 향해 들뜬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만 해도 그들은 명상적인 경험에 빠
져들게 되리라는 것을 전혀 기대하지 못했다. 그러나 9·11 14주년 기념일인 동시에 지방시 쇼를 뉴욕으로 옮긴 그날 저녁, 아티스트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도움과 허드슨 강가에 장관을 연출한 일몰의 협조로 리카르도 티시는 9·11이 가져다준 상실과 그에 대한 애도, 그리고 우리
가 살아 숨 쉬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일깨워주는 명상으로 모두를 이끌었다. 스타일 면에선 티시가 그간 작업해온 아이디어를 재발견하고
정리할 기회였다. 거의 서예와 같은 느낌으로 다채로운 흑백 변주가 반복된 의상은 그의 지방시 초기 시절 고스 취향을 연상시켰다. 실크 슬
립 드레스와 옷감을 몸에 두르고 스트랩을 길게 늘어뜨린 란제리 룩, 그리고 뮬의 뾰족한 앞코까지 부드럽게 떨어지도록 재단한 팬츠 등등.
유연한 크레이프 턱시도 로브, 부드러운 기모노 재킷, 몸매를 감싸는 반짝이는 시프트도 많이 등장했다. 과거에 선보인 꾸뛰르 드레스의 새
버전 역시 장관. 도트를 이어 용의 비늘처럼 연출한 드레스, 악어가죽을 일일이 조각낸 뒤 튤 위에 다시 조합한 드레스까지. 얼굴 장식도 빼
놓을 수 없었다. 금색 스터드 머리 장식과 진주가 달린 튤 마스크는 아름다움의 수준을 강박적이면서도 특이한 방식으로 격상시켰다.